탐색 여행자의 회고록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 (2021)
어린 시절의 나는 자꾸만 묻는 아이였다.
“이건 뭐야?”, “왜요?”, “만약에요?”
말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물음표들이
하루를 이루는 언어처럼 자연스러웠다.
어른들은 언제나 친절하게 세상을 설명해주었지만,
그 이야기만으로는 내 안의 퍼즐이 완성되지 않았다.
나는 더 알고 싶었고,
설명되지 않은 빈칸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질문이 많은 아이였던 나는
그 빈칸을 향해 계속 손을 뻗었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이 내 안에 어느정도 자리잡은 10대가 되자,
우리 가족은 한국을 떠나 몬트리올로 이민을 갔고
나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믿음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모른 채, 모범생처럼, 의심 없이.
하지만 그 신앙은 다소 내성적이었던 나의 성격처럼 조용했고,
교회는 나에게 ‘믿음의 장소’라기보다는
‘이민자 커뮤니티의 장’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20대가 되자,
질문은 다시 나를 흔들기 시작했다.
어릴 적 품었던 물음표들이 성장을 거듭해
삶이라는 이름의 실험실 안에서
하나씩,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10대 내내 쌓아올린 성실함의 산물이었던 대학의 경영학과를 박차고 나와,
들끓던 예술적 감수성을 꺼내 들고는 미대로 향했다.
그때부터 세상은 거대한 연구 대상이 되었고, 나는 앎에 대한 목마름으로 가득 찼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 인간관계, 사랑, 인생, 그리고 ‘나’라는 존재까지.
삶의 모든 것이 물음표로 다가왔고, 나는 그 질문들에 매달렸다.
20대 초반엔 겉으로 드러나는 세계와 정체성에 몰두했다면,
중후반에 들어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관심이 더해졌다.
기독교, 불교, 뉴에이지, 타로, 사주, 신점, 별자리, 심지어 유튜브 셀프 전생 체험까지.
겉으로는 여전히 기독교인이었지만, 속은 이미 혼합주의자였다.
성경을 공부하며 신약을 통독하는 동시에,
사주와 명리학에 빠져 “이건 어쩌면 과학일지도 몰라”라며
[기독교와 명리학의 비교 연구 : 기독교와 명리학의 공존 가능성 모색] 논문을 찾아 읽고,
유튜브로 최면을 걸어 불사조로 하늘을 나는 환상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 광경이 너무 낯설고 두려워 “하나님, 잘못했어요!”를 외친 순간,
“으으”하며 배 속 깊은 곳에서 낮고 낯선 소리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무언가가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기묘한 감각이 나를 휘감았던 기억이 난다.
시크릿, 리얼리티 트랜서핑, 끌어당김의 법칙은 기본,
시계, 주소, 영수증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숫자 1111, 333, 444에 의미를 부여하고,
향을 피운 방에서 가위에 눌리고, 몇초간의 유체이탈을 경험하며,
제3의 눈을 뜨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매직아이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교회로 달려갔다.
선 하나를 넘은 듯한 불안감이 엄습할 때, 나는 울상을 하며 목사님께 개인면담 신청을 했다.
그 끝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있었다.
어쩌면 나는, 성경 너머의 진리를 찾아
신앙이라는 수레바퀴 위에서 끊임없이 탈주와 귀환을 반복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 나는 오랜기간 함께했던 밴쿠버를 떠나
뉴욕과 유럽, 한국을 오가며 몇년간 디지털 노마드로 살았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을린 피부로 발리에서 서핑하는 노마드와는 달리,
삶에 대한 질문에 답을 스스로 내리기 위해
나는 파인다이닝을 즐기고, 비싼 호텔을 고르고,
명품을 모으며 마치 ‘돈 걱정 하나 없는 사람’처럼 살다가도,
어느 날은 반지하 게스트하우스에서 기생충 영화에 나올 법한 화장실을 마주하고,
바르셀로나에선 새로운 매거진을 준비하는 필름 포토그래퍼와,
파리에서는 젊은 시절 보그에서 일했었다는 영화 코스튬 디자이너와 같은 집에서 지내기도 했다.
30대가 되자, 나는 그 모든 여정과 체험, 방황과 갈망 속에서
흩어진 조각들을 조용히 수렴하기 시작했다.
마치 한때 찬란했던 중년이, 한적한 산골로 내려가 인생을 되짚는 듯한 시간이었다.
나는 더 이상 소셜미디어에 나를 드러내지 않았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 곁에서,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조용히 머물렀다.
어쩌면 나는 무한히 팽창하던 나 자신을
잠시 ‘정지’시키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가장 낮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진리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나에게 꼭 맞는 도시를 찾기 위해 떠났고,
이상적인 공동체를 꿈꾸며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어디에도 이렇다할 유토피아는 없었다.
모든 빛은 유통기한이 있었고,
모든 관계가 어느 순간부터는 ‘노력’이 필요해졌다.
그 노력이 진심이라 해도, 그건 영원을 보장하지 않았다.
여행과 현실은 늘 동전의 앞뒷면처럼 존재했다.
어느 도시든 처음엔 황홀했다.
그러나 낯섦이 익숙함이 되고,
그 익숙함이 권태로 바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장소를, 사람을, 일상을 매 챕터마다 바꿨지만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내 안에 깊이 뿌리내린 ‘결핍’ 같은 것.
그 결핍은 외부의 무엇으로는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가 진짜 원했던 건 ‘이해받는 느낌’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누군가 나를 정확히 알아봐 주고,
내 마음의 모양까지 포용해주는 그 감각.
그걸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끝까지 주었던 건
예수님이셨다고.
돌이켜보니, 내 여정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성경이 있었다.
세상의 기이한 현상들과 얽히고 섥힌 이론들,
그 모든 것을 가장 정확하고 함축적으로 설명해주는 유일한 책.
그 안에서 나는 내가 느낀 감정들의 출처를 이해하게 되었고,
한때 이끌렸던 신비한 경험들도 결국 거기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문장들 속에서만이 깊고 진실된 안식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하나,
나는 질문을 너무 사랑했던 사람이었지만,
모든 질문이 ‘답’을 필요로 하진 않는다는 걸 배웠다.
때로는 질문 자체로 충분했고,
그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태도 속에서
삶은 조금씩 선명해졌다.
어쩌면 진리는 지식이나 논리의 언어가 아니라,
'이미 충분하다'는 마음의 언어로
감사와 신뢰, 긍정 속에 조용히 전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시선을 바꾸기로 마음먹었을 때,
세상 모든 곳이 나만의 작은 유토피아가 될 수 있고,
그 유토피아는 조용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나에게 꼭 맞는 세계로 자라난다.
이제는 예전처럼
불안에 쫓겨 다그치듯 묻지 않는다.
“이건 뭐죠?”, “대체 왜요?”, “그러니까 만약에요...”
그 대신, 이렇게 묻는다.
“주님, 오늘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볼까요?”
삶은 여전히 정답 없는 서술형 문제지만,
나는 더 이상 그걸 혼자 풀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
아직 만나지 못한 나.
그 끝엔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생각한다.
‘모든 것이 옳게 돌아가고 있다’라는 마음만 유지한다면
이런들 저런들 어떠할까.
답을 향해 조급하게 달려가지 않고,
진심을 담은 눈과 열린 마음으로 걸어가는 것.
그것이 어쩌면,
진리와 가장 가까운 삶의 자세일지도 모른다.